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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탱아찌
2024. 11. 18. 02:38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순한 사랑과 연애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사랑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을 통해 존재를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비교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삶은 너무 무겁게 살거나 너무 가볍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쿤데라의 작품과 불교의 무아 개념을 연결시켜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무아의 상태에서는 삶이 전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쿤데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책임, 운명,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추구로 보았고, '존재의 가벼움'은 그러한 것들로부터의 해방, 자유로움으로 표현했죠. 그런데 이 둘 다 일종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은 이러한 이원론을 초월합니다. 무아의 상태에서는:고정된 자아가 없기 때문에 '무겁다' 또는 '가볍다'라고 느끼는 주체 자체가 사라집니다. 모든 현상이 연기(緣起)로 이해되어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허상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마치 구름이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것처럼, 무게에 대한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삶의 무거움이나 가벼움에 대한 고민 자체가 우리의 집착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무아의 깨달음은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역사와 이념과 그리고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현재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깊이 와 닿습니다.
역사의 무거움에 대해 , 과거의 상처나 영광을 절대적 진리처럼 붙잡고 있으면서 현재를 희생시킵니다. 역사적 분노나 한(恨)을 대물림하면서 화해와 치유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인데, 그것을 현재까지 끌고 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만듭니다.
사랑과 이념의 무거움에 대해, 가랑과 이념이라는 추상적 관념에 사로잡혀 구체적인 현실의 삶을 보지 못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이상을 위해 지금 여기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있습니다. 이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인간다운 관계와 대화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상(無常)합니다. 역사도 이념도 그리고 사랑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여하는 무거움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이러한 무상함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에 매이지 않고, 사랑과 이념 그리고 미래에 불안해하지 않으며, 현재에 깨어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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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는 인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게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것에 얽매이는 아이러니를 포착했습니다.
여기에 이런 현상들이 보입니다. 가치의 인위적 창조되어 , 우리는 사랑, 명예, 성공 같은 추상적 가치에 무게를 부여합니다. 그 무게는 실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결국 우리가 만든 허상에 우리 자신이 속박되는 것을 알려 줍니다.
존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무게를 둡니다.하지만 그 정체성이라는 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입니다.실체가 없는데도 그것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 부여는 덫이 됩니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그 의미에 따라 무겁게 또는 가볍게 판단합니다.하지만 그 의미라는 것도 우리가 임의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쿤데라는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모순적인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했습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무게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측정하며, 그 측정값에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헛된 노력일지도 모릅니다. 실체가 없는 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더 큰 고통이 따르는 것 입니다다.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과 무아(無我) 개념이 이 문제에 대한 깊은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실체 없음, 과거의 역사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이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둘 다 현재에는 실체가 없는데, 우리는 이것들에 실체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 착각이 우리를 심각함과 가벼움 사이에서 흔들리게 만듭니다.
중도의 시각은 너무 심각하게 보는 것도, 너무 가볍게 보는 것도 모두 극단입니다. 중도란 단순히 중간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분법 자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상태, 즉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입니다.
무아의 상태에서 보면 역사와 이념에 '자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내' 역사, '우리' 이념이라는 소유 개념에서 벗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집착할 대상 자체가 사라집니다. 결국 진정한 지혜는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역사는 역사대로, 이념은 이념대로 그저 흘러가는 현상일 뿐입니다. 여기에 무게를 두거나 가볍게 치부할 필요가 없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해탈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무거움과 가벼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 가는 길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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